2018년 1월 25일 목요일

소그룹 활동에 유용한 질문들 정리

분위기 조성용 & 깊은 관계를 위한 질문들 
 
 
첫째 단계 - 모임이 시작될 때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질문들
 
-좋아하는 영화는? ?
 
-돈과 상관없이 전 세계 어느 곳이든 일주일 동안 여행할 수 있다면 가장 가고 싶은 곳은 어디이며, 왜 그런가?
 
-여름에 할 수 있는 활동 중 가장 좋아하는 것 두 가지는? 둘씩 짝을 지어서 서로 나누고 왜 그것이 좋은지를 설명하라.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조언자는? ?
 
-나의 가장 큰 불만거리 중 하나는?
 
-사람들은 나의 ( )을 알면 놀랄 것이다.
 
-세 가지 소원을 빌 수 있다면 무엇을 빌겠는가?
 
-갑자기 눈이 안 보인다면 무엇을 가장 보고 싶겠는가?
 
-당신이 했던 가장 대담한 일은 무엇인가? 당신이 그렇게 대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남는 시간을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국 방송에서 1분 동안 이야기할 수 있다면 꼭 말하고 싶은 한두 마디는?
 
-가장 오랫동안 잠을 자지 않았던 때는 언제이며 그 이유는?
 
-첫 키스의 경험은 어떠했는가?
 
-만났던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가?
 
-데이트할 때 나는 ( )한 이미지를 갖는 편이었고, 그 이유는( ) 때문이다.
 
-기적을 한 가지만 일으킬 수 있다면(전 세계 사람들을 복음화하는 것 말고) 무슨 기적을 일으키고 싶은가? ?
 
-어린 시절에 누렸던 것 중 가장 그리운 것은?
 
-당신이 한 가장 큰 거짓말은?
 
-만일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떻게 죽기를 선택하겠는가? 어떻게 죽고 싶진 않은가?
 
-죽음에 대해 가장 두려운 것은?
 
-대학을 다시 가게 된다면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가?
 
-가장 심한 폭풍이나 재난을 경험한 기억은?
 
-기억하는 것 중에 가장 지루했던 날이나 행사, 시간은?
 
-인생 중에서 다시 살고 싶은 날은? ?
 
-내가 살았던 장소 중 가장 작았던 곳은? 어떻게 생겼는가?
 
-고등학교 시절에 사람들은 내가 이다음에 아마도 ( )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재미로 하는 이야기인데, 나는 죽기 전에 ( )을 하고 싶다.
 
-직업을 다시 선택한다면 ( )일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다른 시대로 갈 수 있다면 ( )에 가고 싶으며 그 이유는 ( )이다.
 
-내가 경험한 가장 큰 모험은?
 
-내 삶을 편하게 해 줄 기계를 만들 수 있다면 ( )을 만들고 싶고 그 이유는 ( )이다.
 
-내년은 ( )이기 때문에 내게 좋은 해가 될 것이다.
 
-내년은 ( )이기 때문에 문제일 것 같다.
 
-나는 ( ) 부분에서 어머니를 가장 많이 닮았다.
 
-나는 ( )부분에서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
 
-결혼하기 전에 ( )라는 조언을 들어 두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의 후유증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 )에 대해서는 신경이 곤두서거나 서툴기 짝이 없다.
 
-아마 나는 ( )를 결코 안 하겠지만, 만일 한다면 재미있을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해 기억하는 두 가지는?
 
-나의 이름이 갖는 의미는? 왜 그 이름을 갖게 되었는가?
 
-가장 기억에 남는 꿈은?
 
-죽기 전에 이 세상에 한 마디 조언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나를 맛으로 비유한다면, 무슨 맛이겠는가?
 
-어린 시절에 받은 최고의 선물은?
 
-죽은 사람을 한 사람만 다시 살릴 수 있다면 누구를 살리겠는가? ?
 
-나나 나의 가족이 초대하여 만나 본 사람들 중에 가장 흥미로웠던 한 사람은?
 
-남이 나를 평가한 말 중에서 가장 좋았던 말은?
 
-신문에 부고가 날 때 나에 대해 무엇이라고 써 주었으면 좋겠는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는? ?
 
-삶이 힘들 때 가고 싶은 곳이나 하고 싶은 일은? ?
 
-보는 것과 말로 듣는 것 중에서 무엇이 더 익숙한가? ?
 
-자랄 때 동네에서 가장 말썽쟁이였던 녀석은? 어떤 면이 가장 겁이 났는가?
 
-가장 즐거웠던 소풍의 기억은? 무엇이 특별했나?
 
-이번 주에 들은 가장 좋은 소식은? 가장 나쁜 소식은?
 
-어릴 때 형제나 자매가 내게 했던 가장 나쁜 일은?
 
-집에 불이 났을 때 꼭 꺼내 오고 싶은 세 가지는(사람 외에)?
 
-첫 직장은? 가장 기억나는 것은?
 
-가장 좋았던 직장 상사는? 그의 좋은 점은?
 
-어렸을 때 커서 무엇이 되고 싶었는가? 부모님은 당신이 무엇이 되기를 원하셨는가?
 
-결혼식을 다르게 할 수 있다면(낙하산을 타고 떨어지면서 결혼 서약을 한다든지, 수중 결혼식을 한다든지 등) 어떻게 하겠는가?
 
-어려서 나의 영웅은 누구였는가? 그 사람을 닮으려고 어떻게 했는가?
 
-전국 방송에 나가서 국민들에게 세 가지를 하지 말라고 권유한다면 무엇을 말하겠는가?
 
-최악의 상사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내 생각에 사람들이 내 뒤에서 ( )라고 얘기하는 거 같다. 그 이유는 ( )이다.
 
-부부라면 결혼식 얘기를 하라(사전에 이야기가 되면 각 부부가 자신들의 결혼식 사진을 가져 와서 그룹에게 보여 줄 수도 있다).
 
-나의 삶에 일어난 일들을 다음의 항목으로 그룹에서 얘기하라. 옛날 일, 새로운 일, 행복한 일, 우울한 일.
 
-나는 왜 죄를 짓는가?(간단한 대답은 안 된다)
 
-삶의 어떤 영역에서 더 평안하기 원하는가? ?
 
-어느 날엔가 내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떤 영역에서 그럴 것 같은가? ?
 
-미래에 대해 가장 두려운 점은?
 
-과일이나 채소 등에 비유해서 내가 이번 주에 겪은 삶을 설명할 수 있다면 어떻게 표현하겠는가?(마른 무화과, 잘 익은 토마토, 짓밟힌 바나나 등)
 
-아이들의 어떤 점이 가장 좋은가? ?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 중 가장 사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만일 내가 감옥에 1년 동안 수감되어야 한다면 가장 견디기 힘들 것 같은 점은? ?
 
-초등하고 선생님 중 가장 인상에 남는 선생님은?(좋은 경우나 나쁜 경우 상관없이)
 
-대통령과 1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게 된다면 무엇을 부탁하겠는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1년 동안 안식년을 허락받았는데 당신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 밖으로 갈 수 없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나의 삶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때 각 기간 중 가장 의미 있었던 사건 한 가지씩을 말한다면?
 
-그룹 각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 ) 하게 만드셔서 기쁩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그 면이 ( )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내가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것은 ( )인데, 그 이유는 ( )이다.
 
-우리 집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은 ( )이지만 아직도 가지고 있는 이유는 ( )이다.
 
-내 지갑에 있는 것 중에 나에 대해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은 ( )인데 그 이유는 ( )이다.
 
-어렸을 때 하루 중 가장 좋았던 시간은? 일주일 중 가장 좋았던 날은? 일 년 중 가장 좋았던 시기는? 왜 그런 날들이 좋았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 )에 대해 가장 염려한다.
 
-나는 ( )의 영역에서 좀더 중요하게 대접을 받고 싶다.
 
-내가 종종 느끼지만 잘 표현하지 않는 감정은 ( )이다.
 
 
-빌 도나휴, '삶을 변화시키는 소그룹 인도법'(국제제자훈련원)에서
 
 
 
  
 
둘째 단계 - 소그룹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해 주는 50가지 질문
 
우리가 서로를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서로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아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우리 자신을 개방하고 정직해져야 한다. 하지만 깊이 있고 신뢰하는 관계를 만드는 데는 단지 이름이 뭐예요?”, “어디 출신이신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지요?”와 같은 질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멤버들 상호간에 더 강한 유대감을 형성해주기 위해서, 또는 잘 모르는 사람들과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여기에 그룹 전체 또는 두세 명씩 짝을 지어서 토론할 수 있는 질문들이 있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 각자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질문들은 각각 범주별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 여러분의 특별한 관심사나 주제와 어울리는 것을 고르면 된다.
 
이 질문들로 재미있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라. 평생을 지속되는 우정이 어떤 간단한 질문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영적인 질문
 
이 질문은 비록 모든 사람들이 각기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같은 믿음을 갖고 있고 우리 모두는 신앙에 대해 의문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1. 당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
 
2. 지금까지 당신이 가졌던 영적인 경험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경험은 어떤 것인가?
 
3. 지금 현재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는 어떠한가?
 
4.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꾸고 싶은 부분은 어떤 것인가?
 
5. 하나님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 설명해 보라.
 
6. 당신은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 어떤 질문을 하고 싶은가?
 
7. 당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성경 구절은 어떤 것이며, 왜 그런가?
 
8. 하나님에 관한 것 중에서 당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9. 왜 지금 다니는 교회를 선택했는가?
 
10.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왔는가?
 
 
관계에 대한 질문
 
다음 질문은 그룹 멤버들 사이에 유대감과 우정을 쌓게 해준다.
 
11.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이며, 왜 당신들은 그렇게 사이가 좋은가?
 
12. 당신은 친구가 많은 것이 좋은가, 아니면 아주 가까운 몇 명만 있는 것이 좋은가?
 
13. 자라고 나서 누가 친구였다고 생각되는가, 그 이유는?
 
14. 친구가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는가?
 
15. 더 나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 변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16. 당신의 친구들은 당신이 친구로서 가장 좋은 점으로 무엇을 꼽을 것 같은가?
 
 

결혼과 가정에 대한 질문
 
가족은, 좋은 점에서든 나쁜 점에서든, 우리의 모습을 형성한다. 우리 각자가 어떤 유형의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도 상당 부분 가족에 의해 결정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17. 당신의 배우자 또는 당신이 어떤 식으로 프러포즈했는지 이야기해 보라.
 
18. 배우자의 어떤 점을 가장 좋아하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19. 자녀들 각자의 어떤 점을 가장 좋아하며 그 이유는?
 
20. 당신의 가족들이 즐겨 하는 일 중에서 독특하거나 당신이 특히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21. 당신의 배우자와 당신은 어떤 식으로 서로를 보완해 주는가?
 
22. 아이들을 키우며 주로 어떤 일로 놀라게 되는가?
 
23. 아이들에게 큰 소리로 읽어주는 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은 어떤 것인가?
 
24. 아이들의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는가?
 
25. 당신 가족에게만 있는 독특한 점은 어떤 것인가?
 
26. 현재 당신의 가족은 당신이 자랄 때의 이전 가족과 비교해보면 어떤가?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
 
우리 주위의 환경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우리의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 면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자만의 독특한 특성도 허락하셨다. 다음의 질문은 그러한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게 해줄 것이다.
 
27. 당신의 인종적 배경은 무엇인가? 그것이 당신에게 의미가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당신의 가족의 배경은 어떻다고 말할 수 있는가?
 
28. 집에 있을 때 어떤 색깔이나 어떤 물건, 어떤 유형의 장식물을 주위에 두기를 좋아하는가?
 
29. 취미는 어떤 것이며 그 취미의 어떤 점을 좋아하는가?
 
30. 어린 시절 중 가장 좋았던 때는 언제였으며 가장 안 좋았던 때는 언제였는가?
 
31. 아주 어렸을 때의 일들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32. 지금부터 10, 20, 30년 후 당신의 삶은 어떤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꿈과 포부에 대한 질문
 
우리는 어릴 때부터 무엇인가를 목표로 삼는다. 우리의 목표는 매우 개인적이지만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다보면 우리 자신의 깊은 내면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렴풋하게나마 보여줄 수가 있다.
 
33. 당신은 어렸을 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가? 그 꿈과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얼마나 서로 비슷하며, 얼마나 다른가?
 
34. 만일 어떤 직업이라도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가질 수 있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그 이유는?
 
35. 어떤 나라에 가고 싶은가? 그 이유는?
 
36. 돈이 문제가 아니라면 당신의 시간을 어디에 사용하고 싶은가?
 
 

재미있는 질문
 
다음의 질문들을 사용해서 멤버들끼리 서로 더 친해질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을 갖도록 한다.
 
37.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만화 주인공은 누구이며, 그 이유는?
 
38. 당신이 즐기는 창의적인 활동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39. 긴장을 풀기 위해 당신이 특별히 즐겨 취하는 활동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과 혼자서 하는 것 둘 다)
 
40. 어릴 때의 별명은? 왜 그런 별명이 붙었으며 당신은 그것을 좋아했는가, 싫어했는가?
 
41. 주위 사람들보다 특히 더 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42. 지금까지 경험한 일들 중에서 가장 거칠고 어리석고 황당한 일은 무엇인가?
 
43. 당신이 유명세를 탄 것은 언제인가? 유명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가?
 
 

깊이 있는 질문
 
이 질문은 마지막까지 남겨 두도록 한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정보를 노출시켜야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겁을 먹지만 않는다면 이런 과정을 통해 전혀 새로운 차원의 관계가 만들어지게 된다.
 
44. 당신의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
 
45.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46.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심이나 의문점은 어떤 것인가?
 
47. 밤에 잠자리에 들고 나서 어둠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
 
48. 만일 당신이 하나님과 나란히 앉아서 하나님에 대해 갖고 있는 깊고 은밀한 것들에 대해 물어볼 수 있다면 어떤 질문을 하고 싶은가?
 
49. 당신 자신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는 한 번도 말해본 적 없는 이야기를 해 보라.
 
50.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당신의 모습은 어떠한가? 침묵을 즐기는가, 아니면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가?
 
 

-스캇 보렌, '톡톡 튀는 소그룹 아이디어 백과사전'(소그룹 하우스)에서

2017년 9월 30일 토요일

기독교인으로서 동성애에 대한 생각

나는 동성애에 대해 반대도 찬성도 아니다.

본격적인 글에 앞서 일단 내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나는 동성애에 대해 반대도 찬성도 아니다. 하지만,동성애차별금지법에는 찬성이다. 그리고 이 글을 보는 성소수자분들이나 내가 아는 성소수자분들은 기분이 상하겠지만 난 동성애가 정상적인 성적 지향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다.
또한, 나는 평신도 중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이에 지나지 않기에 내 생각이 성경적으로 맞는지 틀리는 지는 명확히 알지 못한다. 어쩌면 내가 현 시점에 생각하고 개진하는 이 의견과 생각은 성경적으로 전혀 틀릴 수도 혹은 어쩌면 성경적 가치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가진 동성애에 대한 의견은 이러하다.
  • 동성애는 성적 지향 혹은 성 정체성이다
  • 동성애가 곧 섹스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 동성애는 성경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성경 속 "침소"는 남녀관계에 한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섭리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 (선택할 용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굉장히 조심스럽지만) 동성애는 무언가 방향이 틀어진 화살이지 않을까 싶다.
    동성애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가 아니라 함부로 이야기할 것은 아니지만, 내 짧은 생각으로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deep한 friendship 사이의 혼란이 아닐까 싶다. 사랑이라는 감정과 좋아한다는 감정, 이성 간의 사랑과 친구와의 사랑 등등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매우 애매모호한 선상에 있지 아니한가?

동성애 차별금지법은 동성애찬성법이 아니다.

작년 박근혜 탄핵 시국 이후 유독 페이스북등을 통해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한게 동성애 차별금지에 대한 이야기다. 이게 상당히 (내 표현으로는) 웃기는 상황인데, 반대의 입장은 굉장한 이분법적 사고에 빠져있는 듯한 느낌을 결코 지우기 힘들다.
대다수 동성애 차별금지법에 대해 반대 의견을 보면, "동성애 차별금지법"이 "동성애 합법화 반대"로 되어 있거나, "동성 결혼 합법화 반대"로 되어 있는 경우를 종종 본다.
무언가 이상하다. 분명 "차별금지법"이었는데 "합법화"로 바뀌어 있다.
(내가 웃기다라고 표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에서 이야기 하는 사탄의 시험의 방법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바꿔서 없는 내용을 추가하거나 있는 내용을 삭제하거나 말을 바꾸어 놓거나 하는 것인데 이 상황이 딱 그와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동성애 차별금지법"에 대해 생각이란 것을 하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한 것이 해당 법안을 찾아보는 거였다. 해서 법무부 입법예고안부터 시작해서 2012년의 김재연 의원 등 10인의 발의안, 2013년의 김한길 의원등 51명의 발의안, 그리고 2013년의 최원식 의원 등 15명 발의안까지 쭉 읽어 보았다. 법 내가 법에 대한 식견이 짧아서 인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는 동성애에 대해 적극 지지한다거나 동성애는 선한 것이다라고 한다거나 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단지 그들이 그들의 성적 지향으로 인해 "차별"을 가하는 행위를 금하는 내용들만을 볼 수 있었다.

성경에서 동성애를 죄라 규정하나?

이 부분은 솔직히 나는 잘 모른다. 혹 성경에 동성애는 죄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아시는 분은 덧글을 통해 의견을 나누어 보았으면 좋겠다. 우선은 반대 기독교계(?)에서 거론했던 몇 가지 구절을 가지고 보려 한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레위기 18:22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레위기 20:13
텍스트 그대로 보자면 여자와 성관계를 하듯 남자와 성관계하는 것을 이야기 하는 듯이 보이기는 하다. 헌데 앞뒤 맥락 전체를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레위기 18장의 처음은 가나안 족속의 풍속을 본받지 말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하여 그 것들의 구체적인 것을 나열하는 것이 그 후반부의 이야기다.
모세 시대 가나안을 차지하고 있던 7 족속은 매우 음란한 족속으로 알려져 있다. 그 땅으로 들어가 살아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풍속을 따르지 말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가나안의 풍습을 따르지 말라한 것은 그들이 동성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을 따르지 말라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성의 본래 가치를 버리고 오로지 쾌락의 도구로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봐야 할것이다. 동성애를 탐욕, 쾌락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 해석이라 자신할 수 있을까?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
열왕기상 15:12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디모데전서 1:10
이 말씀을 가지고 "남색"을 동성애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 "남색"을 살펴보면, 열왕기상에서 언급된 "남색"은 קָדֵשׁ(카데쉬)로 '음탕한 우상숭배 하는데 매춘 행위로 바쳐진 남자'를 뜻한다. 디모데전서에서 언급된 "남색하는 자"는 ἀρσενοκοίτης, ου, ὁ(알세노코이테스)인데 이 단어는 매춘 등의 착취를 의미한다고 한다. 1
사실 이 "남색"과 자주 함께 다니는 용어가 "음행"이라는 용어인데, 결국 쾌락을 좇는 행위에 대함이지 동성애와는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동성애와 동성과의 섹스와 구분을 좀...

앞서 말한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참 기이할 정도로 편협하고 자기 중심적 사고로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짙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동성애 equal to 에이즈" 혹은 동성애는 동성과의 섹스라는 기이한 명제다.
나는 이를 두고 혐오적 학습효과라 해두고 싶다. 과거 우리 사회는 동성애에 대한 혐오적 시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고, 언론 역시도 그에 부흥(?)하여 동성애가 에이즈를 만들어내고 동성애는 동성끼리의 성관계를 가지는 행위로 치부해버리지 않았나? 그것을 아무 필터링 없이 받아들인 덕분에 지금의 인식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는 혐오에 익숙하다. 혐오하지 않는다고 말 하지만 인종에 대한 혐오 (특히 흑인들에 대한), 장애인에 대한 혐오, 여성 남성에 대한 혐오 등등 수 없는 혐오가 넘쳐나고 있는게 현재의 한국 사회다. 동성애는 그 혐오들 중 하나로 자리매김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이성과의 섹스에 미쳐있지 않듯, 동성애자도 마찬가지다. 마치 동성애자는 병적으로 동성과의 섹스에 미쳐있는 이로 평가하는 경향이 큰데 제발 동성애와 동성과의 섹스는 구분해서 생각하자.
적어도 동성애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찾아보든, 기사를 뒤져보든 동성애에 대한 이해를 먼저 하고 비판할 것을 비판하고 혐오하고 싶으면 그 때 혐오하자.

차별행위의 금지에 대해 찬성한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 질문은 늘 크리스쳔으로서 가져야 할 질문일 것이다.
성경에 예수님이 만났던 이들 중에 동성애자는 없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 예수님은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다른 죄인(이라 칭하는)들을 대하신 것들을 보면 짐작해볼 수 있다.
일본 앞잡이와도 같은 민족의 배반자요 구제불능의 세리가 상종 못할 인간으로 취급해야 한다라고 하지도 않으셨고, 간음한 여인를 쳐 죽여도 좋다 음행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것이니 저 여자가 저런 취급을 받는 것을 막아서는 안된다라고 하지도 않으셨다.
개인적으로 나는 동성애에 대해 죄라고 규정하지 못한다. 적어도 나는 그것이 죄라는 명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아니 설사 그것이 죄라고 규정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차별받는 것이 합당하다라고도 역시 할 수 없다.
내가 아는 한, 예수님은 죄인으로 낙인찍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차별받는 이들을 끌어안으셨지 마땅히 저들을 차별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법에 어긋난 죄인이라며 낙인 찍지도 않으셨다.
나는 동성애 자체를 지지하거나 (사실 지지라는 용어도 웃기는 용어다 애초에 지지하고 말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나?) 동성애를 권장하는 인간도 아니다. 하지만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직업을 구할 수 없거나,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괴롭힘을 당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한다거나, 치료를 받지 못한다거나 하는 등등의 차별은 결코 받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교회들이 앞장서서 거짓을 말해서는 안된다

항간에 동성애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이런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고 교회들로부터 공유된 동영상이나 이야기들이 있다.
검색만 해봐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내용들이니 굳이 일일이 나열하지는 않겠지만, 이것들은 다수 막연한 무한 상상력과 자기 합리화가 결합되어 탄생한 세기의 거짓말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대표적으로 동성애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청소년들에게 동성애에 대한 성교육을 하게 되어 많은 청소년이 동성애자가 될 것이다 라는 참으로 기발한(?) 생각이다.
동성애에 대한 성교육을 하게 되어 청소년이 동성애자가 될 거 였으면 이미 많은 청소년들은 섹스에 환장한 놈들이 되어 있어야 정상 아닌가?
동성애 차별금지 법이 통과되면 동성애를 죄라고 이야기하면 잡혀가게 된단다. 국내에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장애인의 접근성이 개선되지 않은 교회들도 더러 많다. 이상하다 벌써 대거 잡혀 갔어야 할텐데...
교회들이 혹은 교인들이 앞장서서 그릇된 정보를 양산하고 공유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마치 오래전(?) 데이비드 오웬의 예언을 퍼다가 마구 카톡이며 커뮤니티며 날라댔던 것과 무엇이 다를까?
개인적으로 더 코미디스럽다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동성애에 대해서는 온갖 반대의 소리를 내면서 왜 전병욱에 대해서는 온갖 소리를 내지 않는걸까?
교회들이 정말 이야기 해야 할 것은 성적 대상에 앞서 성적 탐닉 자체이지 않을까?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인으로서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그것이 정말 동성애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인지, 동성애 자체를 죄로 규정하는 것인지, 동성애자들을 품는 것인지 등등 말이다.
정말 동성애가 죄라 판단된다면, 동성애자들이 죄로부터 떠나 하나님의 섭리대로 돌아도로록 권면해야 할 것이지, 그들이 차별받고 고통받도록 조장하거나 방치하는 것은 분명 아닐터다.
혹은 동성애를 죄라 판단할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그들이 차별받고 고통받도록 조장하거나 방치하는 것 역시 해서는 안 될 일일 것이다.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원칙을 따르고자 함이지, 동성애자들이 차별 받도록 내버려 두거나 그들의 인권이 해쳐지는 것을 남의 일로 치부하고 내버려 두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와 공동체의 건강한 성윤리를 지켜야 함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것을 편견, 아집, 편협한 생각, 내 경험, 짧은 지식등으로 함부로 재단하는 것 역시 금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본 글은 펌글입니다.
https://mulder21c.github.io/2017/09/04/about-sexual-minority/

‘동성애, 신앙, 한국 개신교의 선택’ 권연경교수


한국 교계가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동성애문제는 동성애는 죄라는 불변의 명제하에 지속적으로 에이즈의 위험성만을 내세우며 성경이 정말로 동성애를 죄라고 명시하고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동성애를 옹호하는 쪽과 반대하는 정통주의적 입장의 성경 텍스트 읽기는 무엇인지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시도가 진행됐다.
  
청어람아카데미(대표 양희송)19, 100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에서 동성애, 신앙, 한국 개신교의 선택이란 주제로 청어람 강좌를 진행했다.
  
19일부터 5주 동안 매주 월요일에 진행되는 이번 청어람 강좌 첫 스타트는 숭실대 기독교학과 권연경 교수로부터 시작됐다.
  
성경과 신학이 말하는, 말하지 않는 동성애란 주제로 강연을 한 권 교수는 동성애를 지지하거나 혹은 지지하지 않는 양측의 신학적 입장을 소개하며 양측 입장에 대한 신학적 평가를 내렸다.
권 교수는 먼저 고려해야 할 대상이 현대적 개념의 동성애는 이상화된 동성애일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지속적인 상호간의 신뢰와 사랑, 헌신을 바탕으로 한 이성애와 관계와 비견되는 관계는 성경에서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성경에서 비판하는 동성애는 현대의 동성애와 다르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서 비판하는 동성애는 행위에 대한 것이지 그 사람의 성향이 동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 권 교수의 설명이다.
 

권 교수는 성경이 다른 죄에 비해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어 동성애에 무관심하다고도 말했다. 이를 당시 전통적 보수사회에서 논할 가치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반대로 동성애를 문제 삼을 의사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섣불리 답할 수 있는 물음은 아니지만, 이런 물음의 중요성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얼마 안 되는 성경의 동성애 관련 구절들을 해석할 때, 우리가 성경적일 것으로 생각하는(전제하는) 전반적 분위기가 개별 구절들을 읽는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라며 동성애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열린 자세로 다가갈 필요가 있다.
권 교수는 초대교회의 신학적 삶의 자리였던 1세기 유대교의 맥락을 고려할 때, 신약성경이 동성애를 정당한 것으로 간주한다거나 적어도 배척하지는 않는다는 주장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동성애가 만연했던 그리스 로마와 같은 주변문화들과는 달리 신약성서는 결혼 내에서의 이성적 결합만을 창조질서에 합당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바울 또한 레위기 18장 말씀을 근거로 아버지의 아내와 성관계를 맺는 신자를 비난하며 출교를 명한 것처럼(고전 5:1-13:1) 신약시대에는 성문화에 있어서 굉장히 엄격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성경에 동성애적 관계의 사례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예가 바로 룻과 나오미, 다윗과 요나단, 예수와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 예수와 마가복음의 청년, 백부장과 그의 종(파이스) 등이다.
권 교수는 이런 주장에 대해 성서학자들은 주석적으로 정당화하기 어려운 논의가 있다는 반응이라며 논의는 모든 관계를 성적 차원으로 환원하려는 일종의 “pan-eroticism”의 표현처럼 보인다. 우리가 누리는 관계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은 중요하다. 어쩌면 성적이지 않은, 친구와의 깊고 절실한 우정,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진한 사랑과 유대, 스승과 제자사이의 깊고 진한 사랑에 대한 분명한 이해 역시 동성애와 관련된 우리의 논의를 보다 차분한 것으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권 교수는 성경에 나오는 동성애 관련 구절에 대한 개별적 분석에 들어갔다. 그 첫 번째는 창조기사이다.
전통적 창조기사 읽기는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셨다. 이는 자녀 출산과 번성의 본래의 사명이 남자와 여자의 성관계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동성애가 창조질서에 반한다는 입장을 확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정통 유대교 랍비이자 동성애자인 스티븐 그린버그(Steven Greenberg)는 유대설화를 근거로 남자와 여자의 창조는 이성애적 결합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본래의 창조 속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경쟁을 해결하기 위한 사후적 조치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창조이야기는 애초부터 인류의 발생 기원을 설명하려는 특정한 의도의 산물이라 생식과 출산이 가능한 관계, 곧 남자와 여자의 성적 결합의 차원에서 인류의 시작을 설명하는 것으로 동성애는 창조 이야기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위에서 예를 든 시도들이 주석적으로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창조 이야기를 색다르게 읽으려는 이런 움직임들은 하나님의 창조질서 속에 동성애적 존재방식이 정당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시도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다음으로는 소돔의 죄악에 대한 내용이다. 권 교수는 퀴어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관계를 맺겠다는 뜻이 동성애를 뜻하는 것이 아닌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돔이 멸망했다는 주장에 대해 명확히 말하지만 관계를 맺다는 것은 동성애를 뜻하는 것이 맞다. 동성애가 아니라면 왜 남자를 알지 목하는 두 딸을 데려오겠다고 했겠는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가 단지 동성애 때문에 멸망했다는 주장도 타당한 것은 아니라고 권 교수는 말했다. 이미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가 죄악이 가득해 멸망시키려 하셨고, 천사들이 소돔에 방문한 것은 이 모든 것이 결정돼 롯 가족을 건지기 위한 것으로 즉 멸망의 1차적 원인이 동성애는 아니라는 말이다.
 
 
다음은 레위기의 금지명령에 대해서이다. 구약성경에서 동성간의 성행위에 관한 가장 명시적인 금지는 레위기 1822절 및 2013절에 나타난다.


이 구절에 대해 동성애자 랍비 그린버그는 항문성교 외의 동성적 성행위는 명시적 금지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금지의 대상이 능동적 파트너라는 사실은 수동적 파트너가 되는 것을 수치로 생각했던 당시의 주변 문화와 구별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으며 여기에서 더 나아가 왜 남자 간의 삽입성교가 금지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린버그는 이는 지배와 종속이라는 이념과 관계된다. 남녀차별이 당연시된 고대 사회에서의 성행위는 본질적으로 남녀 간의 지배와 종속을 표현하는 상징적 행위이다. 이런 사회적 맥락에서 남자 간의 성행위는 동등해야 할 둘의 관계를 공격과 굴욕적 비하의 관계로 전락시키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 성경은 이것을 경고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권 교수는 문법적 역사적 비평의 견지에서 볼 때, 본문의 상황을 항문성교로 규정하는 랍비적 관점은 일견 매우 합리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자와 누움이라는 표현이 애초부터 삽입이라는 제한된 상황을 묘사하기 위한 표현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오히려 이는 성관계에 구체적 정황을 포착하려는 수식이 아니라 성관계의 대상을 특정하는 표현이 아닌가? 또한 현대적 주석의 관점에서 볼 때, 1822절의 대상을 능동적 파트너로 제한하고 이 구절과 2013절 사이의 모순을 말하는 것은 문맥상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지나친 분해주의적(anatomistic) 읽기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율법 속의 많은 규정들이 폐기된 마당에, 굳이 동성애 관련 규정의 유효성만 계속 주장하는 것은 신학적 모순이 아닌가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권 교수는 이런 지적이 원칙적으로는 타당하나 상황이 그리 간단치 않다고 말한다. 신약이 율법 전체를 폐기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권 교수는 많은 규정들이 해당사항 없는 것으로 무시되었지만, 바울서신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레위기의 성결법전 중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게 수용된 규정들 또한 많다. 특히 도덕적 규정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동성 성관계 규정이 의식법의 일부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사실 구약 자체는 의식법과 도덕법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신약은 도덕적 규정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을까? 권 교수는 신약성경이 말하는 동성애로 논의를 옮겼다.
  
신약에서도 동성애는 두드러진 주제가 아니다. 도덕적 훈계들이 제시되는 곳에서도 동성애는 거의 언급되지 않으며, 그나마 실제 상황을 다루는 경우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동성애와 관련된 구절들은 모두 다른 논점을 다루는 맥락 속에서 나타나는 부수적인 언급들이라며 이런 상대적 침묵에서 어느 쪽으로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곤란하다.
 먼저 제기된 구절은 로마서 126절과 27절이다. 이는 신약에서 동성 간의 성행위가 명시적으로 그리고 비교적 길게 논의되는 유일한 구절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본문을 동성애 반대에 대한 가장 강력한 근거 구절로 간주한다.
 본문에 대한 전통적 읽기는 이 두 구절은 각각 여자와 남자의 동성 성관계를 다룬다 바울은 인류의 전반적 타락상을 묘사하고 있으며, 여기서 동성애적 행태는 그 타락된 본성의 일부다. 더 나아가 동성애적 행태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기는 대신 피조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적 태도의 필연적 결과다. 동성 간의 성관계는 이성 간의 성관계라는 자연스러운/정상적인 질서, 곧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난다 바울은 동성 간의 성관계를 분명한 범죄로 규정한다 등으로 요약된다.
 
 
권 교수는 물론 본문에 대한 수정주의적 읽기는 바울이 본문에서 동성 간 성행위를 정죄한다는 전통적 해석에 반대한다. 곧 바울은 동성 간 성관계 자체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며, 그에게 있어 이 문제는 윤리적으로 중립적 문제에 해당한다는 것이라며 수정주의적 읽기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갔다.
수정주의적 읽기는 바울은 동성애를 우상숭배적 행태와 연결한 것으로 바울이 동성애를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우상숭배적 맥락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권 교수는 이런 논증은 바울의 신학적 사고 속에서 창세기의 타락의 내러티브와 유대 전승에서 나타나는 이방적 우상숭배의 기원 이야기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부자연스럽다. 명시적으로 타락 신화가 언급된 것은 아니지만, 로마서 1장은 창세로부터, 창조주, 남자, 여자 등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 등장하는 단어들로 가득차 있다고 말했다.

 수정주의적 읽기는 비판의 칼날을 동성애 행위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 배후에 놓인 것으로 추정되는 특정한 사회문화적 이념으로 돌림으로써 동성애 행위에 면죄부를 주려한다. 곧 바울이 논하는 동성애적 행위에 매우 특수한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동성애와 선명하게 구분하고, 이로써 바울의 논의에 해당사항 없음이라는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권 교수는 고대사회의 성행위가 성별 및 계급 간의 위계질서를 반영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이념적 고려가 바울이 동성애를 비판하는 주된 혹은 유일한 이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며 물음표를 던졌다.
 
 플라톤의 향연에서는 성인 남자와 소년의 사랑이라는 동성애적 관계(paiderastia)를 놓고 진정한 사랑의 본질에 관해 나누는 대화가 등장한다. 여기에는 쾌락을 위해 소년의 육체를 탐하는 행동이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몸을 맡기는 행동은 진정한 사랑과 무관한 것으로 비난받는다.
  
권 교수는 여기서 보는 동성애적 사랑의 담론은 적나라한 의미에서의 위계질서 확인이나 착취와는 무관해 보인다. 물론 당시에도 이런 형태의 동성애에 관한 염려와 부정적 여론은 널리 퍼져있었고, 비판 역시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무례하고 나쁜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서 그런 것일 뿐, 절도와 규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세상이 비난할 이유는 없다고, 향연(심포지움)의 한 참가자인 파우사니우스는 말한다. 그렇다면 동성애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바울이나 당대의 유대 저술가들은 동성애에도 이런 인간적인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라고 말했다.
 
 
권 교수는 동성애적 관점에서 성경을 새롭게 읽으려는 이들의 시도는 그 나름의 무리수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또한 기존 해석의 느슨한 부분들을 폭로하기도 한다4가지 사안에 대해 설명했다.
  
그 첫 번째는 서로 다른 읽기 전략이다. 동성애와 관련된 성경 구절들은 대부분 표면적으로 반동성애적이다. 이성애주의적(heterosexist) 관점에서 성경을 읽으려는 이들은 최대한 성경이 묘사하는 상황과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물음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하려고 한다.
반면 동성애적 관점에서 성경을 읽는 이들은 최대한 성경이 다루는 상황과 우리들이 직면한 상황 사이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려 한다. 성경의 해답이 오늘 우리가 고민한 그런 문제에 대한 답변이 아님을 확인함으로써, 성경적 권위의 무게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는 것이다.
 
 
권 교수는 이 두 움직임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는 선험적으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신이 아닌 한, 유사성을 찾으려는 해석 속에도, 그리고 차이점을 부각시키려는 해석 속에도, 모두 나름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섞여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나는 이성애자로서 관련된 본문을 읽어 왔고, 따라서 동성애적 성경읽기의 가능성에 아직 의문이 많지만, 동성애적 읽기의 많은 사례들은 나의 주해와 해석학적 판단 방식에 대해 지속적인 물음을 던진다. 나는 열린 마음으로 이 물음을 경청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다고도 말했다.
다음은 해석학적 투명성 혹은 일관성이다. 동성애적 성경읽기의 색다른 읽기는 이런 점에서 우리의 해석학적 일관성에 관한 물음으로 다가온다. 이런 사례는 내가 성경의 권위를 크게 고백한다고 해서 내 읽기가 더 성경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성경의 권위를 고백하는 것과 그 고백에 어울리는 해석을 추구하는 것은 별개다. 이런 엄연한 사실은 동성애 관련 대화에서 보다 전통적 입장에 선 사람들이 깊이 숙고해야 할 사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 번째는 동성애 문제와 관련된 성경과 그 해석이다. 보스웰이나 마틴 같은 동성애적 관점의 논객들은 종종 이성애주의자들의 성경읽기가 순수한 해석의 결과가 아니라, 이미 형성된 관점에서 출발한 사후적 정당화라고 비판한다. 성경 자체로부터는 그런 관점이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혹은 성경에서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에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권 교수는 이런 비판이 늘 옳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 이성애자들과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 정서의 생김새를 고려해 보면, 성경이 우리 사고의 선구자가 아니라 우리 편견의 사후처리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며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 있어 호모포비아적 토대가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닌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는 성서비평과 문화비평이다. 이성애주의적 저자들은 종종 문화비평에 관한 관심을 드러낸다. 성경의 시대와는 달라져버린 현대문화의 관점에서 성서적 메시지에 대한 비평적 읽기가 필요한 것처럼,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성서적 메시지의 관점에서 역사의 부침에 좌우되는 현대문화에 대한 비판적 읽기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텍스트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성경의 표면적 비난이 현대적 의미의 동성애와는 무관한 것임을 밝히려고 노력한다. 성경은 언제나 매우 특수한 동성애적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그것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혹은 살아가는 동성애적 삶의 방식과 다르다고 말한다.
 
권 교수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그렇다면 다른 도덕적 규정들에 적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에 대해 물음표를 던졌다. 가령 바울은 아버지의 아내, 곧 계모와 성관계를 맺는 신자를 출교시키라고 고린도교회에 명령한 부분에 있어서 이것이 성경에서 금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배후에도 상속 문제와 같은 모종의 사회경제적 요인이 얽혀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때 그런 사회경제적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계모와의 성관계가 허용되는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권 교수는 어쩌면 우리는 성경 자체의 권위보다는, 우리가 수긍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물음을 던졌다.
 
 
권 교수는 혼전순결이나 동성애 같은 주제는 부담스럽다. 이런 부담의 많은 부분은 현실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보다 정확히는 내가 믿는 성경의 메시지와 현실 사이의 격차다. 그리고 이 둘의 목소리 모두 무시하기에는 너무 강력하다. 사회적, 신학적 소수자의 자리에 선 동성애자들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라며 성경을 읽는 우리는 이런 상황적 절박함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상황적 절박함은 성경의 텍스트에 대한 폭력으로 변환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권 교수는 성서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성애라는 현대적 현상에 대해 보다 세밀한 이해가 필요하다. 특히 나와 같은 이성애자들의 입장에서는 동성애라는 불편한 현상 자체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며 강연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