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3일 화요일

성숙한 시민성의 그루터기는 '탁월하게 다른 삶'이다

성숙한 시민성의 그루터기는 '탁월하게 다른 삶'이다
 
지상강좌 기독교윤리 5
 
성숙한 시민성의 그루터기는 탁월하게 다른 삶이다
 
문 시 영 교수
숭실대학교(B.A., M.A., Ph.D.)와 장로회신학대학원(M.Div.)에서 공부했다. 현재 남서울대학교 기독교윤리 교수로 있으며, 새세대교회윤리연구소(NICE) 소장이다.
 
 
사람은 좋은데? 사람이 좋아야!
흔히 쓰는 표현 중에 사람은 좋은데하며 말끝을 흐리는 경우가 있다. 무능하다거나 문제가 있다는 뜻의 반어법이기 쉽다. 그런가 하면 조사助詞 하나 바꾸었을 뿐인데 뜻이 확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야하는 경우가 그렇다. 사람 됨됨이가 마음에 든다고 좋은 평가를 내린 셈이다. 두 경우 모두 사람에 대한 평가라는 점에서는 공통이나 하나는 부정적인 평가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평가다. 무능하거나 실수가 많더라도 사람이 좋아야 한다. 무능하고 실수도 많은 데다 사람까지 좋지 못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물론, 사람도 좋고 능력도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윤리적으로 사람 됨됨이에 대한 평가는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한 번의 도덕적 실수로 한 사람의 인생 자체가 도매금으로 좋지 않게 평가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매도하는 것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기는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한 마리 제비가 날아왔다고 해서 봄이 된 것은 아니다. 한 번의 실수로 한 사람의 인생과 가치관 전체를 문제투성이로 몰아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 역시 비슷한 경우 아닐까. 반사회적인 범죄 행위를 눈감아주자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더구나 하나의 행위를 근거로 누군가를 평가하는 것은 도덕적 성숙 혹은 갱신을 기대할 수 없게 한다. 예수께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7:1라고 하신 말씀에도 이런 뜻이 담겨 있을 듯싶다. 지금의 행위로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의 사람 됨됨이나 배경을 생각한다면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변화될 모습까지 생각하면 하나의 행위만으로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한 사람의 됨됨이를 말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법률시스템이나 사회정책에 의해 결정되는 요소가 있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가 자라난 배경, 가정의 분위기, 특히 그가 신앙인인가 혹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들을 탁월하게 풀이한 윤리학자가 있다. 타임지가 2001년 미국 최고의 신학자America’s Best Theologian라고 격찬했고, 기포드 강연Gifford Lectures에 초청받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듀크대학교의 하우어와스Stanley Hauerwas가 그 주인공이다.
그의 왕성한 저술 활동이 현재진행형이기에 단편적으로 평가하는 우를 범하고 싶지는 않지만 하우어와스가 윤리의 관점을 ‘doing’의 문제에서 ‘being’의 문제로 전환시킨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것은 그의 윤리관을 대변한다. 하우어와스에게 윤리란 구체적인 행위에 대한 율법시스템이 아니다. 행위자의 배경과 그의 이야기를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상황윤리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니다. 행위자의 성품character을 중요하게 보자는 뜻이다. 우리가 하우어와스에 주목하는 것은 그의 관점에 교회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보여주는 요소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제인 시민사회의 도전에 직면한 한국 교회를 위해 공공신학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대안이 되리라 기대해 본다.
 
사람 됨됨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이 교회 밖으로의 윤리를 제안한 것과 달리 하우어와스는 교회 안으로의 윤리를 말한다. 시민사회에 들어가 사회정책과 윤리를 주려고 할 것이 아니라 교회 스스로 사회윤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하우어와스의 생각을 요점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윤리를 교회론적 윤리’ecclecial ethics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교회의 교회됨을 구현하자는 취지다. 교회로 교회되게 하면 시민사회가 따라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교회론적 윤리의 핵심은 무엇인가? 하우어와스를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계기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요더John. H. Yoder와의 만남을 통해 얻은 평화에 대한 신념이요, 다른 하나는 맥킨타이어A. MacIntyre의 영향을 받은 공동체주의적 관점이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앞서 말한 설명에 빗대어 보면 좋은 사람의 성품은 교회공동체의 이야기를 통해 형성되고 훈련된다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도덕적 자아는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있는 존재이며, 교회 공동체를 통해 그의 성품이 형성되고 훈련되어 평화의 사람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하우어와스가 공동체를 통해 형성되는 성품 혹은 사람 됨됨이에 주목하는 과정을 따라가 보자. 연대기적 순서를 따르자면 요더의 평화주의를 접한 것이 먼저겠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맥킨타이어와의 만남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자아에 대한 이해와 공동체에 대한 이해가 하우어와스의 교회론적 윤리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강좌를 사람 됨됨이로 출발한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특히 윤리가 행위의 문제에서 인격 또는 성품의 문제로 무게 중심이 이동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우어와스가 보기에 윤리학자의 임무는 개별적 윤리문제에 답을 주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인의 인격을 형성시키는 데 있다. 그에 따르면 인격이란 자아가 존재하는 형식으로서 당연히 자아는 어떤 정체성을 지니는가? 성품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가?’ 등의 질문이 제기된다. 여기에서 공동체주의라는 개념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현대영미철학의 논쟁에서 자유주의는 이성에 입각한 윤리적 자유를 주장하지만 공동체주의자들은 이성에 대한 추종이 오늘의 윤리적 위기를 낳았다고 본다. 공동체주의자들에 따르면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덕의 윤리를 회복해야 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은 특히 자아에 관한 설명에서 칸트적 설명을 거부하고 자아의 배경에 관심을 가진다. 인간은 추상적인 유령적 자아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우어와스는 계몽주의적 기획과 포스트모던 문화를 비판하기 위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덕의 윤리를 활용했던 도덕철학자 맥킨타이어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인간을 이야기하는 존재로 여기는 맥킨타이어에 동의하면서, 하우어와스는 공동체주의를 수용한다. 인간은 공동체에 속한 존재요, 공동체가 지닌 이야기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윤리적으로 성숙된다는 생각이다.
여기에는 사람 됨됨이에 관한 기독교적 설명이 고스란히 반영된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공동체 안에 존재하며,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를 통해 훈련받고 성숙한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교회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교회의 이야기, 즉 예수 이야기를 통해 자아와 인격이 형성된다는 뜻이다. 하우어와스에 따르면 교회는 기독교적 덕성의 훈련장이요,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인을 성숙시키며 윤리적 독창성과 탁월성을 지닌 존재로 만들어가는 곳이다. 교회 공동체에 대한 강조, 교회를 통한 윤리적 훈련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하우어와스의 윤리를 교회론적 윤리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람 됨됨이, 예수 이야기로 형성되다
그렇다면 신앙인의 덕성을 훈련시키는 교회는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가? 어떤 덕성을 함양하고 성숙시켜야 하는가? 하우어와스에 따르면 신앙인의 윤리는 자연법 윤리와 다르다. 신앙공동체에 속한 존재들은 복음의 이야기 속에서 정체성과 역할을 발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서 예수 이야기’Jesus narrative에 충실해야 한다. 교회가 지닌 이야기는 다름 아닌 예수 이야기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며 십자가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대목에서 하우어와스는 나름대로의 목소리를 낸다. 특히 평화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이것은 하우어와스의 윤리 형성에 있었던 또 하나의 계기, 즉 요더와의 만남을 통해 설명된다. 특히 전쟁에 대한 반대와 비폭력을 근간으로 하는 기독교적 평화의 가치는 하우어와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 평화주의자로서 메노나이트 신학자인 요더에게 예수 내러티브의 핵심은 십자가. 요더가 속했던 메노나이트의 전통은 그의 관점을 무저항, 비폭력의 평화주의에 이르게 한다. 요더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십자가로 상징되는 새로운 윤리로 우리를 부르셨다. 그리스도는 근본적으로 철저히 다른 새로운 삶의 질서를 지닌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함으로써 기존 사회를 위협했으며 십자가로 대변되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우리를 초대하셨다.1 그리고 예수와 같이 되는제자도와 본받음의 핵심에 평화가 있다는 것이 요더의 관점이다.
이러한 요더의 흔적들은 하우어와스의 관점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하우어와스가 듀크대학교로 자리를 옮겼을 때 그곳 철학과 교수인 맥킨타이어를 만난 것이 공동체주의를 발전시키는 계기였다면, 요더와의 만남은 핵심가치들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평화의 덕성과 교회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한 요더의 암시가 하우어와스 윤리의 토대인 셈이다. 더구나 요더가 교회를 예수 이야기의 공동체로 보았던 점 또한 하우어와스에게 중요한 흔적으로 남아있다. 요더가 교회를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로 간주하고 국가의 대안이라고 보아 영적 정치 행위를 강조했던 것도 그 중 하나다.
하우어와스에게서 요더의 영향은 윤리적 관심과 방법론 자체를 전환시킬 정도였다. 본래 하우어와스는 예일대학교에서 리처드 니버의 제자인 거스탑슨의 지도를 받아 계시의 의미와 책임적 자아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노트르담대학의 교수로 부임한 이후, 이미 노트르담의 교수로 활동하고 있던 요더의 책은 하우어와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하우어와스는 전쟁에 대한 반대와 평화주의를 강조하는 큰 틀을 마련했다. 평화를 위한 덕성이 예수 이야기의 핵심이요 교회가 가르쳐야 할 윤리적 독창성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하우어와스에 따르면 기독교인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예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배운다. 그 배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 평화의 백성으로 성숙한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점령군 로마인들에 대한 적개심보다 용서와 자유의 비전을 제시한 것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신앙인들은 예수 이야기를 따라 우리 시대를 향한 평화의 메신저가 되어야 한다. 그 핵심에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자리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위해 십자가 지는 각오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하우어와스의 윤리가 평화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평화가 그의 윤리에서 중요한 이슈인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그를 주목하는 데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전반적으로 그의 윤리가 시민사회와 다른길을 강조한다는 것이 그 중요한 이유다. 그의 윤리에서 시민사회와 다른길을 강조는 대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겠다. 평화에 대한 강조 역시 애국주의와 자본주의에 찌든 시민사회와는 다른 길을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다. 그가 교회를 향하여 미국의 시민사회와 경제시스템, 그리고 의료문제에 이르기까지 다른길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르게 살기, 그 불편한 동거
이제 남은 문제는, 실상 우리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민사회와 교회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이다. 필자 나름대로 소화해서 말한다면 하우어와스는 시민사회 속에서 다르게 살기를 제안한다. 근거와 모델은 교회가 지닌 예수 이야기다. 십자가를 통해 평화를 가르치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이 다르게 사는삶의 핵심이다. 단순하게 다른 방식이 아니라 탁월함으로서의 다름이다. 교회가 십자가의 길을 따라 평화를 위해 살아가면 결국 시민사회가 따라오게 될 것이며 이 길을 묵묵히 가는 것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보자. 기독교의 사회윤리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우어와스의 답은 그렇게 살아내기 자체가 쉽지 않지만 간단명료하다. 교회가 지닌 예수 이야기가 곧 사회윤리다.2 여기에 사용된 ‘narrative’내러티브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표현을 쓰든 간에 예수 이야기가 교회공동체를 통한 성품 형성에 배경이 된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하우어와스에 따르면 내러티브는 모든 공동체에 필수요소다. 특히 예수 이야기는 시민사회와 구분되는 목소리를 내는 교회만의 독특한 이야기다.3
그가 이런 말을 하는 데는 신앙인에 대한 그의 관점, 곧 신앙인이란 교회에서 예수 이야기대로 살도록 훈련받고 성숙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관점이 깔려 있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찌 보면 시민사회 속에서 교회공동체는 불편한 동거 관계에 있다. 하우어와스에 따르면 신앙인은 시류에 영합하는 존재라기보다 나그네 된 거류민resident aliens이다.4 일찍이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듯싶다.
하우어와스는 윌리몬과 공저한 책 첫머리에 상징적으로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3:20~21.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늘에 시민권을 둔 자로서 세상과 다르게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혹은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정책으로 정리된 사회윤리를 제시하기보다는 시민사회의 대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보여준 셈이다.
그래서 하우어와스는 교회가 사회문제들에 어설프게 개입하지 말라고 한다. ‘예수 이야기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현실주의에 입각한 사회윤리를 강조했던 라인홀드 니버를 자주 비판한다. 저술에 대한 학문적 비판뿐 아니라 사회문제에 관한 니버식 접근 전반에 대해 비판적이다. 니버가 현실 정치에 관하여 사회구조와 정책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기독교의 이름으로 정책을 제시하는 형태로 개입했던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하우어와스가 보기에 교회는 사회정책을 입안하는 기구가 아니다. 예수 이야기대로 살아내면 시민사회가 따라올 것이라는 신념의 반증이다. 교회가 곧 사회윤리라는 말은 이런 뜻이다.
실제로 그는 미국의 정치 및 경제시스템과는 다른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데 거침이 없다. 하우어와스는 교회와 세상을 동일시하는 콘스탄틴주의적 성향이 기독교를 세속적 권력과 결탁시키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미국의 기독교가 사회문제들에 가담하여 애국주의나 국수주의로 흐르는 경향을 반대한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이 도덕적 정당성을 얻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 바탕에는 폭력에 대한 거부, 특히 의로운 전쟁론에 대한 반대가 깔려있다. 오히려 교회는 폭력에 의한 갈등처리가 일상화된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5 하우어와스는 미국의 시장경제에 대해서도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은 고삐 풀린 욕망의 사회에 살고 있다. 미국의 문화는 끊임없는 소비를 부추기는 거대한 욕망의 슈퍼마켓일 뿐이다.6 나아가 안락사와 임신중절과 같은 의료문제까지도 시장 자본주의적 접근과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세상적 가치와 전혀 다른, 독특한 삶의 원리를 따라 살자는 것이 하우어와스의 요점이다. 세상과 전적으로 다른 원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어설프게 동화되지 말자는 것과 같은 뜻이다. 정책을 제시하고 개입하는 것 자체가 타협이요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의 방식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셈이다. 그에 따르면 오히려 세상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시대 문화에 만연된 쾌락주의, 우상숭배에 가까운 국가숭배 등에 맞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자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야비하고 불의한 세상에서 예배라는 잔치를 베풀 수 있는 소망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 나라를 지배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 하셨던 예수의 길을 따르자는 것이다. 교회는 이 세상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길을 간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어쩌면 교회 역시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불편한 동거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거나 교회 스스로 세상에서 퇴거하자는 뜻으로 들리기 쉽다. 이러한 비판을 의식한 듯 하우어와스는 자신의 생각이 세상에서 은둔하라는 것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이 세상에서 주의 말씀대로 살아내기에 힘쓰자는 뜻이라고 말이다. 심지어 이렇게 말한다. “그것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세상 밖으로 몰아내려 할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 있어야 한다.”7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은 예수 이야기의 공동체에 속한 자로서, 세상과는 다르게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우어와스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은 합리적인 언어들로 번역하여 설명될 것도 아니요 시민사회에 뛰어들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의 이야기대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면 된다. 우리가 지난 호에 살펴 본 스택하우스와는 정반대의 방향을 제시하는 셈이다. 실제로 현대기독교윤리학에서 공공신학과 라이벌로 간주되기도 한다.
하우어와스가 예수 이야기의 공동체와 평화를 실천할 성품과 덕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독특한 다름에 대한 주장이 지나쳐 윤리적 게토에 갇힐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소종파주의로 흐를 위험성이 있다는 비판이 따라다니는 이유다. 혹은 세상으로부터의 퇴거주의라는 비판도 받는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우어와스가 여전히 활동하고 있기에 창의적인 제안들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 성품, , 그리고 평화에 대한 그의 메시지가 더욱 풍요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기를 기대해 본다.
 
시민사회에서 교회다운 교회되기
솔직히 필자가 교회특강 혹은 설교에서 공공신학과 교회론적 윤리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노라면 상당수의 청중들이 공공신학보다 하우어와스에게 관심을 가진다. 공공신학이라는 이름부터가 왠지 복음적인 신앙인들에게는 부담스러운가 보다. 한국 교회의 복음적 신앙전통에서는 말씀대로 살아서 교회다운 교회를 세우자는 이야기가 공공신학보다 호소력이 큰 셈이다. 왜 그럴까?
분명 하우어와스의 제안은 안팎으로 안티와 변화의 요구에 직면한 한국 교회가 귀담아 들어야 하는 내용이다. 한국 교회는 교회의 교회됨에 관하여 혹은 교회다운 교회에 대하여,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다르게사는 방식에 관하여 고민해야 할 때다. 특히 교회부터 새로워져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직면한 한국 교회에 좋은 길잡이일 수 있다. 문제는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 그리고 시민사회가 교회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선 필자가 보기에 하우어와스를 한국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아시아적 가치관이 작용할 수 있다. 공공신학에 멸사봉공의 아시아적 관점이 적용될 수 있다면, 교회론적 윤리에는 사회에 본이 되고 귀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적용될 수 있겠다. 더구나 사람됨을 우선시하는 것은 덕과 원만한 대인관계를 중시하는 아시아적 가치관에 가깝다. ‘덕스러움혹은 후덕厚德을 높이 평가하는 문화가 그것이다. 교회에 대해 사회가 본받을 만한 그 무엇을 요구하는 것도 아마 이런 영향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하우어와스는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귀감, 이를테면 공공신학처럼 공공성이나 투명성을 말하지 않고 다른이야기를 한다. 예수 이야기대로 다르게살자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기독교윤리학자가 예수의 윤리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중용의 윤리가 아닌 극단의 윤리라고 설명했던 것과 가까워 보인다. 하우어와스가 평화를 강조하면서 미국 시민들에게 자녀들의 군복무에 대한 깊은 생각이 필요하다고 암시한 부분에서는 묘한 뉘앙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바라기는 다름에 관한 강조가 세상 속에서 극단의 길을 걷자는 말로 이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한 가지 더 짚어보자. 예수 이야기대로 사는 것이 시민사회와의 단절이어서는 곤란하다. 다름으로서의 독특성을 주장하는 것은 좋으나 신앙의 사사화로 흘러서는 안 된다. 예수 이야기에 충실하게 산다는 것이 우리들끼리의 집단적 사사로움으로 전락하지 말아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 하우어와스의 윤리는 공공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다른방식의 소통이다. 그가 이라크 파병 반대를 말한 것도 공공의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말한 것에 다름 아니다. 시민사회의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되 다른 길을 제시하는 노력인 셈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한국 교회에는 말씀이 부족한 게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내는 게 부족하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12:2 사는 길이 무엇인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다. 교회다운 교회를 세우는 일, 교회로 교회되게 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교회가 교회다워도 시민사회가 문제를 삼는다면 그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신앙인의 사람 됨됨이 역시 다르지 않다. 교회 안에서 예수 이야기대로 살기로 결단하는 복음적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교회 밖으로 시민적 공공성을 압도할 성숙한 시민으로 나서야 할 때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느니라약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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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ohn H. Yoder, 예수의 정치학, 신원하·권경연 옮김 (서울: IVP, 2007), 101~102.
2. Stanley Hauerwas, A Community of Character: Toward a Constructive Christian Social Ethic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81), 40.
3. 앞의 책, 69.
4. Stanley Hauerwas & William H. Willimon, Resident Aliens: Life in the Christian Colony (Abingdon Press, 1989) 11~13.
5. Stanley Hauerwas & William H. Willimon, 십계명, 강봉재 옮김 (복있는 사람, 2007), 125.
6. Stanley Hauerwas & William H. Willimon,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이종태 옮김 (복있는 사람, 2006), 108.
7. 앞의 책, 111~112.

개혁주의와 한국사회_ 조병수

개혁주의와 한국사회 (2001.8.13. 개성연 하계수련회, 조병수)
 
 
 
1. 서론
 
 
 
사회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다. 사회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개인들로 형성되는 집단이다
개인들의 이해관계는 크기에 있어서 작은 규모의 것으로부터 큰 규모의 것에 이르기까지, 성질에 있어서 아주 단순한 것으로부터 아주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대상에 있어서 우호적인 것으로부터 적대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렇게 개인들의 이해관계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양하다 할지라도 언제나 불가피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그것은 이러한 모든 이해관계의 배후에는 인간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라는 것은 인간성을 뿜어내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지닌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자연히 인간의 문제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사회는 개인으로 표출되는 인간을 표현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회는 인간의 표현이다
이렇게 볼 때 개인과 사회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 뿐 만 아니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대체적으로 개인의 성향이 사회의 성향을 위한 전제이다. 때로는 어떤 지도자적인 개인의 의견을 대중이 환영하게 되어 사회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아주 단순한 경우를 말하자면 디자이너의 아이디어가 다수의 개인들에 의하여 환영을 받고 사회적인 유행으로 확산되는 것이라든가, 조금 더 복잡한 경우에는 카리스마적인 정치지도자의 정치적인 구상이 시민들에게 매려되어 국가전체의 구조로 자리잡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아니라도 평범한 개인들의 성향이 사회화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다. 예를 들어 이동에 있어서 빠른 속도를 추구하는 개인의 성향은 자동차 산업을 활성화시키는 사회의 성향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사회의 성향이 있고야 비로소 개인의 성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성격이 사회의 성격보다 앞선다. 다시 말해서 개인은 사회의 전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합리적인데 사회는 비합리적이라든가, 개인은 비합리적인데 사회는 합리적이라든가 하는 개인과 사회의 반립적인 구조는 거의 생각해 볼 수 없는 것이다. 개인과 사회는 결합적이다. 사회는 언제나 인간에 근거한다. 사회는 인간에 따라서 그리고 인간과 함께 변화한다. 사회의 변화는 인간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 사회에 타락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인간에게 타락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들이 타락하기 때문에 사회도 타락한다.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바라볼 때도 개인과 사회의 결합구조를 부인할 수 없다. 한국사회는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가장 분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성향이 한국사회의 성향으로 현실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인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면 한국인의 성향은 무엇인가? 한국인에게 나타나는 긍정적인 측면들이 적지 않게 많이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이런 긍정적인 모습은 구태여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인의 모습을 고찰할 때 한 눈에 보기에도 한국사회에는 부정적인 의미에 있어서 개인의 성향이 극도에 달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부정적인 개인성은 주로 세 가지로 정리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한국인에게 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민족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첫째로 언급해야 할 개인의 부정적인 모습은 개인의 인격이 소유하고 있는 상태가 본질적인 차원에서 기형적이라는 것이다. 기형성은 개인이 자리잡고 있는 고유한 위치에서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 못한 모습을 의미한다. 이것은 한 개인이 일반적으로 지녀야 할 본질을 소유하는 대신에 비정상적인 요소들로 말미암아 개인성이 왜곡된 경우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것은 개인의 과잉성이다

과잉개인은 개인성의 왜곡을 가장 잘 보여준다. 더 나아가서 개인의 부정적인 모습과 관련하여 이탈성을 제시할 수 있다. 이것은 한 개인이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비정상적인 위치로 탈선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상 이탈성이란 기형성의 발전이다. 개인의 기형적인 본질이 확대되면 이탈적인 성향을 보이게 된다. 개인의 이탈성의 문제는 극단적인 차원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므로 말할 것도 없고 소극적인 차원에서도 정확하게 지적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기형성이 확대되면 이탈성으로 나타나고, 개인의 이탈성이 극대화되면 파멸성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탈성이 기형성의 발전적인 결과라면, 이탈성의 극단적인 결국은 파멸성이다. 그래서 한 개인에게서 보여지는 가장 큰 부정적인 모습은 스스로의 파멸이다. 이것은 한 개인에게 있어서 본질의 변형이라든가 궤도의 이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파멸에는 대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든지 회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문제는 한국인의 문제에서 기인한다. 이 때문에 한국인에게 기형성, 이탈성, 파멸성이라는 세 가지 부정적인 모습은 결국 한국사회에서도 자명하게 드러난다. 기형성이 조직의 구조적인 문제를 가리킨다면, 이탈성은 탈선적인 문제를 가리키며, 파탄성은 해체적인 문제를 가리킨다. 물론 이런 현상은 한국인과 한국사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모든 사회에도 해당되는 것임을 주지해야 한다. 이제 이와 같은 구도 속에서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파악하고자 한다. 우선 한국사회의 문제를 현상적인 차원과 내면적인 차원에서 논의하고, 후에 개혁주의가 한국사회에 어떤 해결책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2. 한국사회의 현상적 문제점
 
 
 
가장 먼저 한국사회가 보여주는 현상적인 문제를 살펴보자. 사회의 현상적인 문제는 다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지만, 결국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하여 종합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인간이 어떤 차원에서든지 인간의 영혼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성이다. 이것은 사회의 종교적 측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성으로서 좁은 의미에 있어서 사회의 사회적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셋째로 사회적 현상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에서 나타나는데 이것은 사회의 환경적 측면이다.
 
 
 
1) 한국사회의 종교적 측면
 
 
 
한국사회의 종교적인 현상은 매우 복잡한 듯이 보이지만 사실상 간단하게 전래 종교, 외래 종교, 신흥 종교로 분류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한국사회의 전래종교라는 것은 세계의 거의 모든 민족에게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샤마니즘, 토테미즘, 애니미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전래종교는 주로 미신적인 것으로서 점술과 주술의 방식으로 널리 보급되어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한국사회의 전래 종교들이 외래 종교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모습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외래 종교는 일찍부터 소개된 불교를 비롯하여 유교의 전통과 기독교가 큰 세력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이외에도 비록 크게 활동적이지는 않지만 일본과 동남아에서 수입된 외래 종교들이 있다그런데 대체적으로 외래 종교들은 한국사회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변형되는 현상을 자아낸다

더 나아가서 흥미스러운 것은 외래 종교들이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본래의 색채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근자에는 한국사회에서 새로 생산된 신흥 종교들이 적지 않게 많이 있다. 특히 외래 종교의 수입물결이 강해지면서 신흥 종교의 발생은 더욱 빈번해졌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한국사회의 신흥 종교들 가운데 고유한 성격을 띄는 것은 거의 없고, 보통 전래 종교와 외래 종교의 변형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현금에 전래 종교, 외래 종교, 신흥 종교로 축을 이루는 한국사회의 종교세계는 기형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각각의 종교 현상은 다른 종교 현상들로부터 영향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고유한 본질을 유지하지 못하고 변질되고 말았다. 이러한 현상은 전래 종교와 외래 종교와 신흥 종교 모두에게 일반화되어 있다. 심지어는 타종교와 세속화에 가장 비타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마저도 한국사회에서는 변형과 변질을 겪으면서 기형적인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기복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의 세속화 또는 물질화에서 분명하게 파악된다.
종교가 기형화되는 현상의 배후에는 과잉추구가 도사리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종교의 형태든지 본연의 성질에 만족하지 않고 그 외의 것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이 종교의 기형화의 동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의 기형성은 그 자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종교의 기형적인 형태는 반드시 종교의 탈선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종교의 탈선은 종교인의 육체와 정신 뿐 아니라, 윤리와 생활에 강제력을 행사한다. 종교인의 신체에 물리적인 행동을 가하고, 비윤리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며 (예를 들면, 나체 파티, 약물복용), 집단생활과 집단노동을 강요하며, 재산을 몰수하고, 결혼과 이혼을 강요하고, 사회생활을 금하며, 이탈자에 대하여는 가혹한 보복을 시행한다. 이것이 종교의 과도한 행동이다. 종교는 도에 지나친 행동으로 말미암아 본래의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이렇게 하여 탈선적인 종교의 과도현상은 사회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친다. 종교의 탈선이 사회에 부정적인 파장을 일으킨다는 것은 종교가 사회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종교는 사회에 대하여 영혼과도 같은 기능을 한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종교는 사회의 영혼이다

그런데 종교의 탈선적인 현상은 결국 파멸적인 현상으로 나아간다. 종교의 파멸성은 양면적으로 나타난다. 첫째로 파멸성은 종파가 분열한다든가 집단자살을 기도하는 방향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둘째로 예리한 종교비평가를 살인한다든가 자폭적인 방식으로 기존사회질서를 파괴하려 한다든가 이런 방향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종교의 과잉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의 기형성과 이탈성과 파멸성의 중심에는 과잉성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 종교에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는 과잉성이다.
 
 
 
2) 사회적 측면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좁은 의미에서 있어서 순수한 사회적 측면이다. 사회적 측면은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보자면 개인, 집단, 국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기형성, 이탈성, 파탄성은 여실히 드러난다. 여기에서는 주로 개인과 집단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국가에 대하여는 마지막에 간단히 지적하고자 한다.
 
 
 
(1) 기형성
 
 
 
개인에게 기형성의 대표적인 것은 변태적인 일상이다. 무엇보다도 변태일상이란 개인에게 시간분배가 불량한 것을 의미한다. 한국사회에서 개인은 하루뿐 아니라 주, , 년에서 모두 불규칙한 생활을 한다. 한국사회에서는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조차도 일상의 시간분배에서 실패한다. 이런 불량성은 한 개인이 동시에 주간직업과 야간직업을 가짐으로써 가시화되는 경우도 있다. 맞벌이 부부에게는 남편과 아내의 시간사용 범위가 뒤바뀌기도 한다. 직업여성에게는 맞벌이 부부의 문제로 가사에 임할 수 없고 자기 아기를 돌볼 수 없는 문제점이 발생하기도 한다. 게다가 한국사회에는 회식문화가 구조적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여성들은 낮 시간을 잃고, 남성들은 밤 시간을 잃는다. 여기에서 개인적인 시간의 과잉소비를 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물로 나타나는 것은 여가시간의 결핍으로 인하여 취미생활은 물론이고 작업시간과 휴식시간까지도 부족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 결과로 한국사회는 시간부족현상 앞에서 무질서해지고 무책임해지게 되었다.
  
 
또한 개인의 기형성은 과잉경제에서도 나타난다. 먼저 한국사회에서 개인의 과잉경제는 지나친 소유에 대한 의지에서 풀이된다. 한국사회에서 개인은 대체적으로 과잉소유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잉소유란 이미 현실생활에 충분한 물질적 혜택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무시하고 그 이상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소유를 추구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한국사회에서 발견되는 과잉소유의 문제 중에 가장 악한 것은 빈곤 속의 과잉이다. 말하자면 개인이 생활의 한 부분에서는 심각한 빈곤을 겪고 있으면서, 생활의 다른 부분에서는 과도한 풍요를 감행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최소급여자가 최신승용차를 구입하는 경우이다

결국 과잉소유추구는 과잉소비를 낳는다. 한국사회에서 과잉소비는 오랫동안 치료하지 못하고 있는 고질병가운데 하나이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한탕주의나 복권당첨을 바라는 요행주의가 한국사회를 멍들게 하는 요인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아나바다 운동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기 운동)과 같은 건전한 시도는 거의 실효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는 "이제 대중들은 자신이 생산하는 것에 의해서 동실시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소비하는 것에 따라 동일시되는 존재로 되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금의 한국사회에서는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 생산이 아니라 소비라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집단의 기형성은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한국사회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병폐는 지역주의와 지역이기주의이다. 지역주의는 소위 지방색이라고 불리는데 한국사회에는 해방 후에 남북의 갈등과 동서의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지역이기주의는 지역주의에서 파생하는 것이지만 조금 더 규모가 작은 사회적 현상으로서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데 특히 지방자치제가 도입되면서 훨씬 더 강하게 작용을 하고 있다. 지역주의와 함께 등장하는 것은 연줄망과 연고주의이다. 연줄망과 연고주의는 한국사회에 융단폭격 하는 듯한 피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왜냐하면 한국사회의 모든 분야와 영역에 이러한 악질적인 세균이 스며들어 있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연줄망과 연고주의는 학교의 출신과도 관계가 있어서 교육제도의 문제점을 부채질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 한국사회에서도 집단의 기형성은 불평등의 문제에서도 완연하게 나타난다. 불평등은 주로 두 가지 종류로 표현된다. 첫째로 구조적인 불평등이다 (구조불평등). 구조불평등은 사회적인 집단 내에서의 계급화에서 야기된다. 또한 불평등에는 성적인 불평등이 있다. 성불평등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으로서 성차별 (억압)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사회적 집단의 기형성은 과잉시도이다. 예를 들면 집단의 과잉시도는 다른 사업체들을 질식시키고 사업을 독식하는 독과점화와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대기업화에서 아주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제적인 과잉시도 외에도 사회의 과잉성은 교육과 예술, 체육, 대중문화와 같은 분야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어려움 중에서 대표적인 과잉교육이다. 예술과 체육 그리고 대중문화에서 나타나는 과열현상도 한국사회가 소화하지 못하는 커다란 문제점이라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가 없다.
 
 
 
(2) 이탈성
 
 
 
위에서 기형적인 상태는 반드시 이탈성을 야기시킨다고 지적하였다. 개인의 기형성에서 개인의 이탈성이 나온다. 개인이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는 현상은 무질서와 무책임에서 가장 쉽게 발견된다. 이것은 시민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사회에서 개인들은 새치기와 끼어들기 또는 그와 유사한 행동에 아주 익숙해 있다. 새치기와 끼어들기는 개인의 사회적 이탈에서 대표적인 현상이다. 또한 이러한 행위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표현되는 양보불허와 대열파괴도 개인의 사회적 이탈로서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무책임과 관련하는 불법적인 쓰레기 처리, 폐수 방출, 폐자재 유기와 같은 처사들을 언급할 수 있다

개인의 기형성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또 한 가지 양상은 중독이다
이미 한국사회에서 개인이 대중미디어 (특히 TV)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더 나아가서 영상녹화물 (Video)에 대한 중독이라든가 최근에 급증하고 있는 인터넷 중독은 개인의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이탈현상은 알코올 중독과 마약적인 약물복용이다. 물론 이런 개인의 중독성의 배후에는 대체적으로 음란과 폭력에 대한 욕구가 도사리고 있다

이로부터 개인의 이탈은 범죄 (사기, 절도, 강도)와 음행 (매춘, 간통, 강간)으로 발전한다
불행하게도 이런 것들은 이미 청소년비행에서 선취적으로 경험된다 (소년비행. 왕따, 학원폭력). 최근에 들어서 개인의 이탈은 성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성의 이탈은 의상에 있어서 성통합적인 (unisexual) 현상을 보이고 있을 뿐 만 아니라 모습에 있어서 성무별적인 (asexual) 현상도 나타난다. 이런 상황에서는 남성이 여성화되고, 여성이 남성화된다. 성과 관련된 이탈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성전환적인 (transsexual) 시도이다. 최근에 한국사회에서는 성전환 (Transgender)이 공공연하게 정당화되고 있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집단의 이탈성은 해체와 이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할 수 있다. 우선 가정에 관하여 말하자면 가족해체와 핵가족제도를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은 일종의 이기주의의 일면이다. 연고주의가 강해지면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폐쇄적인 성향이 나타난다. 구조불평등과 계급화에 대한 반작용은 노사분규이다. 이런 현상들은 모두 관계파괴라는 현대인의 현실적 상황에 근거를 두고 있다. 집단의 이탈성에서 가장 큰 문제로는 농촌해체와 도시화를 들 수 있다. 종래의 학군을 중심으로 하는 인구이동이나 신도시를 선호하는 인구이동과 같은 현상들도 사실상은 집단의 이탈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3) 파탄성
 
 
 
기형성과 이탈성은 결국 파멸성으로 인도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형성과 이탈성으로 말미암아 개인이 맞이하게 되는 파멸이란 피동적인 측면에서는 육체질환, 정신질환 (신경쇠약, 우울증, 자폐증, 광란증, 자학증), 자살로 나타나고, 능동적인 측면에서는 착취, 폭력, 살인으로 나타난다.
 
 집단과 관련하여 파탄성은 가정분란 (가출, 별거, 이혼), 소득분배불량과 빈곤, 주택문제와 교통마비, 기업의 도산과 대중문화의 파괴성을 거론할 수 있다.
 
국가의 문제는 간단히 지적하고자 한다. 국가의 기형성은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화된 국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국가에서는 독재체제가 지배하고 정보회로가 폐쇄되는 특성을 나타난다. 국가가 정상적인 궤도에서 이탈하는 경우는 정당정치의 병폐, 주권당의 횡포, 정부의 국민의견 외면, 종교적 민족주의, 우익강세, 무기거래 (밀수출), 국제적인 폭력을 말할 수 있다. 국가의 파산은 혁명에 의한 것이나 멸망을 제시할 수 있다.
 
 
 
3) 환경적 측면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환경적인 측면을 고려하게 만든다. 인간에 의한 자연의 기형화는 동식물에 다같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더 크고 많은 생산량을 위하여 식물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일이나, 더 부드럽고 맛있는 살코기를 얻기 위하여 동물을 인공적으로 사육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에 의한 자연의 이탈은 골프장이나 스키장을 건설하기 위한 산허물기, 갯벌훼손, 댐건설, 고속도로 건설 등에서 잘 나타난다. 결국 이와 같은 자연의 기형화와 훼손은 무서운 파멸을 결과시킨다. 홍수, 열대야, 생태계 교류의 파괴, 환경호르몬의 악영향 같은 것들이다. 결국 인간은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대기, 식수, 식품 등에 있어서 어려움에 처하고 말게 되었다.
 
 
 
3. 한국사회의 내면적 문제점
 
 
 
한국사회는 인간이 영혼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를 설명하는 종교적인 측면에서든지,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를 설명하는 사회적 측면에서든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설명하는 환경적 측면에서든지 전체적으로 기형성과 이탈성과 파멸성이라는 현상적인 문제를 완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한국사회가 이와 같은 현상적인 문제를 나타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한국사회의 이면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가. 이제 간단하게 한국사회의 내면적인 문제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한국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내면적인 문제점은 쾌락주의 (Hedonism)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쾌락을 얻는데 모든 감각기관을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이 넘치도록 충분하게 구비되어 있다. 쾌락주의에서 두 가지 현상이 발생한다. 첫째는 이기주의이고, 둘째는 편리주의이다. 이기주의는 쾌락을 추구하는 경우에 반드시 동반되는 현상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쾌락주의는 편리주의로 연결된다. 불편한 것에서는 쾌락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기주의에서는 파관주의 (破關主義)가 나오고, 편리주의에서 물량주의가 나온다

파관주의란 모든 관계를 깨뜨리는 것으로서 이기주의의 극한표현이다. 파관주의는 자발소외와 타자파괴로 구체화된다. 편리주의는 대형화를 목표로 삼는 물량주의에서 절정에 달한다 (대형백화점, 대형서점 등). 물량주의는 신속성 ("좀더 빠르게")과 편리성 ("좀더 편하게")과 신선성 ("좀더 새롭게")을 실현하는 것을 지향한다. 그런데 결국 한국사회의 내면적인 문제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일련의 현상들에서 항상 작용하는 요소는 과잉성이다. 쾌락주의라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감각작용을 과도하게 사용하려는 것이다. 이기주의와 파관주의는 자신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과잉현상이다. 편리주의와 물량주의는 쉽게 다량의 물건을 향유하려는 시도이다

이렇게 한국사회의 모든 면에는 과잉성이 들어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만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과잉개인이며, 사회가 아니라 과잉사회이고, 국가가 아니라 과잉국가이다. 한국사회에는 모든 면에서 결핍과 빈곤이 해결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모든 면에서 과잉과 풍요가 행세를 하고 있다. 과잉성은 한국사회의 최악의 문제이며 최대의 적수이다.
 
 
 
4. 개혁주의의 사회참여관
 
 
 
한국사회는 현상적으로 볼 때 뿐 아니라 내면적으로 볼 때도 매우 심각한 상태에 처해 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상황 안에서는 발견할 수가 없다. 개혁주의는 이러한 사회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오직 사회 외적인 방식에 의존한다. 마치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밖에서 일어나듯이 사회의 구원도 사회의 밖에서 일어난다고 믿는 것이다. 사회학의 실패는 사회의 문제를 내재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이에 반하여 개혁주의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인간과 인간의 사회에는 안전한 치료가 가능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개혁주의의 사회관은 비관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Bieler는 칼빈의 사상을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 사실을 잘 지적하였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좀 더 깊고 본질적인 지식을 산출해내지는 못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본성의 궁극적 정체를 인간에게 전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자연스러운 교제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무데도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소위 칼빈의 급격한 비관주의를 만나게 되는데 이 비관주의가 사실상 그의 복음주의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로 개혁주의의 사회관에서 낙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사람이 변하는 것이 사회가 변하는 근본적인 조건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개인을 변화시키시고 후에 사회를 변화시키신다. 사회의 변화는 개인의 변화에 의존한다. 하나님께서는 변화된 사람을 통하여 사회를 변화시키신다. 따라서 변화된 사람은 사회를 개혁하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변화된 사람은 어떻게 사회개혁에 참여하는가. 개혁주의의 사회참여의 원리는 무엇인가. 개혁주의의 사회참여관은 영역과 방식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전영역 참여
 
 
 
첫째로 영역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개혁주의는 사회의 전영역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개혁할 것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개혁주의자는 사회가 서로 상관없는 개인들의 조잡한 단체가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 다시 말하자면 사회의 유기체라고 생각한다. 이 사회적 유기체는 인류의 복잡한 생활에서 발생한 독특하면서도 서로 관계된 많은 영역들로 구성되었는데, 각 영역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책무와 명령이 있다. 여기에서 사회의 영역주권을 말하게 된다. 이 영역은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이 주권을 주셨고, 또한 특별한 책무를 수행하라고 맡겼으므로 자신의 영역 내에서 주권적인 권리를 가진다.
 
 
 신자는 독특한 주권을 가지고 있는 각 영역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문화적인 사명을 수행한다. 사회에의 능동적인 참여에 관하여 Meeter의 진술을 들어보자.
 
 
"칼빈주의자는 마치 종교가 하나님과 관련된 인간의 사적 생활에만 관계가 있고, 인간과 인간의 사회와는 상관이 없는 것인양, 종교와 사회 생활이 분리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조직화된 형태의 사회는 물론 조직화된 형태의 사회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며,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야 한다 ... 칼빈주의자의 의무는 그로 하여금 사회를 피해 수도자의 삶을 살도록 하지 않고, 사회생활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서 사회에 하나님의 지배력을 증진시키도록 이끄는 것이다 ... 칼빈주의자는 신비적으로 하나님을 명상하는 일에 빠지는 수동적인 형태의 개인들을 만들지 않는다".
 
 
 인간의 사회는 문명인과 야만인, 가치가 있는 사람과 가치가 없는 사람, 친구와 원수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분리적 질서와 대립적인 구조와 상반적 체계를 지니고 있는 사회의 모든 영역에 긍정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조건은 사람들을 그 자체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quoniam in Deo, non in seipsis considerandi sunt).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오류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을 보고 사람을 보면 사회에 대한 긍정성이 생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확대시키라고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긍정적 사회참여의 동인은 하나님에 의거한 인간접근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조망에 의존할 때에만 사회의 모든 영역을 편견없이 바라보며 변화시키기 위하여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이때 비로소 이기주의와 파관주의가 깨어진다.
 
 
개혁주의의 사회참여관은 전분야의 개혁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절정에 달한다. 사회를 개혁한다는 말에는 사회의 두 가지 성격이 전제된다. 우선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회개혁의 이유는 사회가 피조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며,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회의 타락성 때문이다. 사회는 하나님의 피조세계이지만 타락하여 부패해있기 때문에 그 본연의 성격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개혁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회의 전분야 개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모든 분야에 그리스도께서 주권적으로 개입하심으로만 가능하다. 사회의 모든 분야의 개혁은 어떤 인간적인 방식에 의하여도 가능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내적인 충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에 대한 Bieler의 한 견해를 들어보자.
 
 
"먼저 부부관계를 생각해보자.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인간성을 회복시키심으로써 남자와 여자가 다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고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개입하심으로써만 비로소 천성적으로 나뉘어져 있는 부부의 결합이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여자를 열등한 존재로 격하시키려는 남자의 경향을 감소시킨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 다음 가족을 생각해보자. 오로지 그리스도의 중개를 통해서만 수많은 죄의 세력에 의해 찢긴 가족의 유대를 회복시킬 수 있다".
 
 
 
2) 조절주의
 
 
 
이에 더하여 방식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개혁주의의 사회관에서 중요한 것은 조절주의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사회의 전영역적인 병폐의 배후에는 과잉성이 도사리고 있다. 과잉성이란 것은 조절의 실패를 의미한다. 자기 통제력을 상실했을 때 과잉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검소, 절약, 정직, 성실과 같은 미덕들을 실천한다. 사실상 조절의 원리는 성경의 교훈이다. 사도 바울은 조절의 원리를 정확하게 가르친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고전 6:12).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고전 10:23). 

조절주의의 원인은 두 가지이다. 사도 바울은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를 설명하는 단락에서 조절주의의 원인을 분명하게 언급한다. 첫째로 개혁주의가 추구하는 조절주의는 사람을 위한 성격을 가진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 10:24). 이것은 인간적 조절주의이다 (principle of human control). 둘째로 개혁주의는 하나님을 위하여 조절주의를 추구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이것을 가리켜 신적 조절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principle of Divine control). 

신적 조절주의는 "모든 일과 인생의 모든 선택에서 오직 언제나 자신의 의식에 임재하시며 언제나 그 눈으로 자신을 보시는 하나님께 대한 가장 면밀하고 기운찬 경의에 의해서 통제되는 구속받은 사람"에 의하여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두 가지 원인에서 출발하는 조절주의에 의하여 개혁주의의 사회참여관이 정당하게 형성되는 것이다.
 
 
 
5. 결론
 
 
 
개혁주의가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한국사회에 긍정적인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부정적인 면이 훨씬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한국사회의 문제점은 사실상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와 사회와 환경이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기형성, 이탈성, 파멸성이라는 세 가지 개념을 가지고 한국사회를 살펴보았지만 이런 구도에 포착되지 않는 부분은 말할 수 없이 많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만큼 한국사회의 병폐와 질환은 크고 깊은 것이다. 개혁주의는 이러한 한국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격리되는 것도 개혁주의의 길이 아니며, 한국사회에 용해되는 것도 개혁주의의 길이 아니다

개혁주의는 한국사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전영역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며, 질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해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노력은 전영역 참여관과 조절주의라고 요약될 수 있다. 따라서 개혁주의의 사회참여관은 소극적으로 말하자면 참여하지만 동화되지 않는 것이며,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적극적 참여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와의 분리가 아니라 구별일 뿐이며, 사회에의 융화가 아니라 참여일 뿐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회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므로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회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개혁주의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사회의 문제를 해결한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사회에 의하여 개인이 매도되거나, 개인에 의하여 사회가 파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자주 발생하는 문제점은 바로 이와 같은 양자의 현상이다. 개인이 사회에 의하여 매장되는 일도 비일비재하거니와 사회가 개인에 의하여 농락당하는 것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개혁주의는 사회를 존중하지만 개인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개인주의적 사회주의를 말할 뿐 아니라 개인을 존중하지만 사회의 안정을 보호하려는 사회주의적 개인주의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혁주의는 여기에서 머물지 않는다

개혁주의는 개인에게 있는 타락성이 사회에서 그대로 표현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개인과 사회를 모두 억제하는데 관심을 가진다. 기형성, 이탈성, 파멸성은 개인에게 나타나는 대로 사회에서도 나타난다. 만일에 이것들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개인도 사회도 모두 파산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개혁주의의 사회관에서는 개인억제와 사회억제가 다같이 중요하다. 이와 같은 억제는 다른 말로 하면 조절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주의의 조절성은 한국사회의 과잉성을 개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이다. 이렇게 할 때 한국사회는 인간의 쾌락과 이익과 욕구를 추구하는 인간적 인간의 사회에서 오직 "하나님 안에서 생활하며 의존하여 존재하는" (17:28) 신적 인간의 사회로 변화되는 것이 개혁주의에 의하여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