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금요일

마르틴 루터의 성 금요일 설교

 <마르틴 루터의 성 금요일 설교>

1.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잘못된 이해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고난을 잘못된 방식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그저 유대인들을 향해 분개하거나, 가룟 유다의 죽음을 말하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것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불평하고 뒷말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과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걸 두고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묵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주님의 수난을 이야기한다면 차라리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의 사악함에 대하여‘라고 제목 붙이는 게 더 낫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만 해도 우리에게 여러 유익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고난을 머리에 한 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랫동안 금식을 하거나 긴 시간 동안 기도하는 것과 같은 영적인 유익을 준다는 식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무 십자가나 십자가 그림을 집 안에 걸어놓거나 십자가 목걸처럼 작은 십자가 장신구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 그 십자가가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상상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기들을 불행을 막아내는 방패나 부적으로 사용합니다. 이것 역시 예수님의 고난을 엉뚱하게 묵상한 탓입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해골 언덕에 오르실 때 예수님을 따르며 슬퍼했던 여인들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면서 죄 없는 분이 그런 끔찍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두고 슬퍼하고 탄식합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십자가 사건을 슬퍼해야만 바른 묵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여인들에게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책망하시면서, “차라리 자기 자신과 그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자신들을 위해서 울어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까지 말한 방법들, 즉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의 잘못만 들추거나,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를 지켜준다고만 말하거나, 죄 없는 사람이 왜 고난 받냐며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제아무리 십자가를 많이 이야기하고, 장시간 기도하고, 설교를 수천 번 듣는다 해도 예수님의 고난을 바르게 묵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II.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바른 이해
예수님의 고난을 바르게 묵상하는 사람이라면, 우선 예수님의 모습 때문에 그 심장이 공포로 얼어붙게 됩니다. 그것이 첫 번째 반응입니다. 왜냐하면, 고난 받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죄인을 너무나도 가혹하고 엄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거침 없은 진노와 심판은, 죄인을 구하기 위해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의 생명 값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너무 큽니다. 이사야 53:8에 나오는 "그는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였다"하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 이토록 고난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죄인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우리는 십자가 사건 앞에서, 우리 자신의 상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그제사 알게 됩
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바르게 깨달을 때, 우리 자신의 심령은 참으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고, 심지어 죽는 것과 같은 통증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우리의 양심은 공포로 얼어붙고, 공포는 더 깊어질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로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주인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죽게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36-37에 보면,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가 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고 외치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공포에 떨면서 사도들을 향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떨며 부르짖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손을 꿰뚫은 못을 보면서, 그 못이 바로 우리의 잘못된 행동 때문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머리를 찌르고 있는 가시관을 보면서 그 가시가 바로 예수님을 피흘리게 만드는 우리의 악한 생각들이란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시 한 개가 예수님의 피부를 찌르고 피 흘리게 하는 것을 볼 때, 그 장면에서 우리는 수천 개의 가시가 나 자신을 찔러야 마땅하다는 것, 그리고 그 가시들이 영원히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훨씬 더 엄청난 고통으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대못이 예수님의 손과 발을 관통한 것을 보면서, 우리는 자신이 영원히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고, 더 많은 못에 박히는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신 그 말씀이 우리 마음을 진동하는 울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나의 순교를 보고서 너희가 어떤 운명에 던져져야 했는지 깨달으라" 하시는 말씀으로 우리 마음에 울려 퍼져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묵상의 단계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악한 현실의 직시하고, 거기서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생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고난을 참되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때문에 몸과 영혼에 그토록 무서운 형벌을 받으셨다면, 그것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와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묵상은 그 어떤 설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깨달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고난을 알고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자신의 강팍하고 굳은 마음을 스스로 돌아보고 두려워하고 떨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고난이 바로 나의 것임을 이생에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지옥에서라도 그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생에서 경험하지 않는다면 지옥에서 당하는 길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공포에 떨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모든 것을 직접 겪게 될 것입니다. 임종의 순간에 이것을 경험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님의 고난을 바르게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우리 마음 가운데 심어주시지 않는 한, 그의 고난을 스스로 깊이 있게 묵상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로 나의 죄에 대한 형벌로 경험케 하시는 이유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고 사모하도록 하려는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를 향한 형벌로 알게 되는 것은 여러분의 사색하는 이성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주어집니다.


III. 그리스도의 고난이 주는 위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를 향한 형벌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이리저리 쫓아다니거나, 돈으로 면죄부를 사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하거나, 교회에서 어떤 공로를 쌓아 죄를 없애보려는 잘못에서 벗어나 참으로 자유케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를 여러분에게서 떼어 그리스도께로 맡기고, 그분이 나의 죄를 담당하고 해결하셨다는 진리만 신뢰하길 바랍니다.
이사야 53:6에서는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라고 하셨고,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24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하셨으며, 바울은 고린도후서 5:21에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경 말씀들을 의지하여 모든 짐을 예수님께 맡깁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셨고, 그가 부활하심을 통해 죄에 대해 승리하셨습니다. 이 부활로 인해 우리의 두려움이 비로소 사라집니다. 그리스도가 사망 권세를 이기셨다는 것을 믿으면, 죄에 대한 두려움은 부활의 능력에 의해 삼켜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고난 가운데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부활하심을 통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만약, 지금 여러분이 이런 죄 용서의 능력을 믿을 수 없다면, 여러분은 이 진리에 대한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의 문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이 믿음을 위해 삶의 자세를 고쳐잡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공포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제는 당신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정확히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과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그 사랑으로 가득 채우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마음을 통과하여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까지 더 높이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여러분은,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그처럼 여러분을 사랑하실 수 없으셨다는 것을... 그리고 바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때문에 예수님이 여러분을 향해 사랑으로 복종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여러분은 요한복음 3:16에 있는 말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주님의 말씀을 비로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말씀 위에서 우리의 신앙과 신뢰는 확고한 것이 되고,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 안에서 새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이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히 세워지길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나 죄에 대한 원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심판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죄의 원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새로운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받으신 고난은, 우리가 세상을 위하여 받아야 하는 고난의 모본이 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하면서 슬픔과 아픔을 당하고 있다면, 그 슬픔과 아픔이 그리스도의 가시와 못들에 비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생각하길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떠나기 싫은 것을 떠나고, 어떤 것을 억울하게 포기해야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결박당하고 사로잡히셔서 이리저리 끌려다니셨는지를 기억해보길 권합니다.
속에서 또다시 죄가 고개를 치켜들때 예수님을 떠올리길 바랍니다. 교만이 여러분을 공격할 때 여러분을 사랑하신 주님이 살인자들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얼마나 조롱과 수치를 당하셨는지를 다시 한번 떠올리길 바랍니다. 내 안에서 부정함과 욕망이 고개를 들면, 그리스도의 연약한 살이 찢기고 창에 관통되고 구타당하실 때 그 고통이 어떠하셨는지 기억하길 바랍니다. 증오와 시기가 여러분을 부추기면서 복수하라고 외칠 때,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많은 눈물과 부르짖음으로 여러분과 또 모든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는지 기억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다가 시련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때 시련이 여러분의 몸과 영혼을 괴롭힌다면, 마음을 굳건히 하고 이렇게 말하십시오. “아! 내 주님께서 염려와 슬픔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과 피를 흘리셨는데, 이 정도쯤이야 나도 견뎌야 하지 않겠는가? 주인이 죽음의 고통과 투쟁을 하셨는데, 종인 내가 발 뻗고 편히 누워있기만 바란다면, 나는 게으르고 부끄러운 종이 아니겠는가!” 이런 묵상의 방법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악과 나쁜 습관들에 대항할 힘과 위로를 발견하고,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따르는 것이며, 고난의 열매입니다. 주님의 삶과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것들이, 그분을 참되게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나타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24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마음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은 무성한 말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진실한 행동과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히브리서 12:3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1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 안엔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르게 묵상하는 일이 아주 드문 게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가득 차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조잡한 설명으로 바꾸어버렸고, 행사로 바꾸어버렸고, 장식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의 입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성금요일 설교) 마르틴 루터의 성금요일 설교 (출처: 루터선집 10:203-211; 영어원서 Luther's Works 42:7-14)
*덧)
1. 중앙루터교회 성금요일 저녁예배 설교는 루터의 이 원고를 낭독합니다.
2. 퍼가셔도 됩니다.

* 출처 최주훈 목사님 페이스북

부활절 찬송 콘티

부활을 찬양하는 곡

할렐루야 살아계신 주 D – Ron Kenoly 곡

부활했네 E

주의 이름 높이며 G

영광의 주님 찬양하세 A

예수 열방의 소망 A

선포하라 부활하신 영광의 주 A

무덤에서 승리하심을 찬양

무덤 이기신 예수 F – 스캇 브레너 곡

주 예수 기뻐 찬양해 F

승리하였네 G

기뻐하며 승리의 노래 부르리 E

기뻐하며 왕께 노래 부르리 G

부활 찬양 연결 곡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C – 재림을 기대함

아버지 사랑 내가 노래해 G – 부활을 이루신 아버지 사랑 찬양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G – 부활하신 주를 바라보자

주님의 영광 나타나셨네 A

영광 가장 높은 곳에 영광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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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 곡

무덤 이기신 예수 F 주 예수 기뻐 찬양해 F

승리하였네 G 주의 이름 높이며 G

부활했네 E 기뻐하며 승리의 노래 부르리 E

영광의 주님 찬양하세 A 주님의 영광 나타나셨네 A

167 즐겁도다 이 날 G 171 하나님의 독생자 Ab (기타 G or 원곡 A)

느린 곡 :

예수 열방의 소망 A ▶ 선포하라 부활하신 영광의 주 A

2022년 4월 15일 금요일

6월 찬양콘티

 6월 찬양콘티


6월 첫째 주


1.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찬송가 95장) D

2. 세상 모든 민족이 G

3. 예수 열방의 소망 A

4. 나의 맘을 주께 (나의 소망은) G



6월 둘째 주


1. 찬양하라 복되신 (찬송가 31장) G

2. 거리마다 기쁨으로 C

3. 기뻐하며 왕께 G

4.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내 G



6월 셋째 주


1. 아버지 사랑합니다 F-G

2. 완전하신 나의 주 F

3. 온전케 되리 C

4. 은혜아니면(오직 예수뿐이네) D



수요기도회(금요기도회)


1. 주의 이름높이며 G

2. 내 모든 삶의 행동 주안에 G

3.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G

4. 주 앞에 엎드려 E



수요기도회(금요기도회) 2


1. 주 보좌로부터 물이 흘러 C

2. 주 우리 아버지 G

3. 모든 민족과 방언들 가운데 A

4. 빛 되신 주 E-F

5. 거룩하신 하나님 F